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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사회 종교 학벌사회 (김상봉)

넷볼러 2011.10.05 11:05 Views :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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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사회, 김상봉, 한길사, 2004, 2,000원.

 

 

한국사회에서 학벌이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 나아가 권련을 좌우한다는 말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 누구나 좋은 학교에 다니고 싶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권력과 돈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원래 대학은 학문을 위해 가는 곳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돈과 권력을 쥐기 위해 간다. 한국사회에서 대학을 안나오면 그것도 좋은 대학을 안나오면 사회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시되고 있다. 반대로 좋은대학을 나오면 그 사람의 됨됨이는 볼 것 없이 주변으로부터 받는 대우가 확실히 달라진다.

 

이런 현상은 운영자도 자주 느끼는 현상이며, 주변에서도 자주 목격하는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초중고교는 좋은 대학을 가기위해 치열한 경쟁을 치루는 장으로 자리잡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은 그들의 삶과 관련없는 교과서 내용들을 암기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예를들어 미적분은 일반 사람들이 평생을 갈아가는데 아무 쓸데도 없는 수학의 한 영역이다. 그러나 전국의 수많은 고등학생들은 이것 공부하고 평가받고 서열지워지고 입학할 대학이 결정되며 이 과정을 통해 평생동안 누릴(?) 사회적 지위와 권력 돈이 결정된다.

 

또한 영어도 마찬가지다. 실제 한국인들 중 평생동안 외국인과 만나서 대화를 할 기회를 갖는 사람은 사실 극소수에 불과하다. 외국여행을 하더라도 사실 영어가 그리 효과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가이드가 있는 여행의 경우 전혀 필요없으며 영어를 필요로 하는 여행을 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또한 외국인과 만나서 업무를 보거나 일을 하는 직업을 갖는 사람은 전체 한국인 중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수많은 학부모들이 자녀 영어학원과 과외에 엄청난 돈을 쓰고 있다.

 

실제 한국인 중 영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직업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외국 기업을 상대하는 회사의 직원, 외국인 회사에 다니는 사람, 외국인을 손님으로 상대하는 매장의 직원 등이 다 아닐까. 오히려 영어학원에 관련된 사교육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수가 아닐까?

 

얼마전 TV에 대부분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을 포기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일부 상위권 학생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수학이 어려워 수학공부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학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1학기에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과 저녁자리에서 교육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수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외국에 비해서 우리나라 수학이 어려운 이유는 수학계의 ‘5거두’가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 나왔다. 쉽게말해 5개분야에서 권위를 갖고 있는 5명의 대학교수들이 있는데 그들이 중고등학교 수학에서 자기분야를 꼭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도록 압력을 넣고 있기 때문에 수학이 어렵다는 말이었다.

 

말이 수학적 개념의 이해, 논리력 발전, 실생활속에서 합리적인 문제해결력 향상이라고 하지만 엄청난 학습양과 입시경쟁이 맞물리면서 수학은 학생들에게 스트레스 가중의 제1과목이면서 첫 번째로 포기하는 교과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런 학교공부의 문제들은 모두 일류대를 들어가기 위한 경쟁과정에서 파생되는 것들로 대학입시의 근저에는 학벌이라는 우리 사회만의 고질적인 병폐가 자리잡고 있다. 고졸과 대졸자가 사회에서 받는 처우의 차이가 대학을 가게 만들고 일류대냐 아니냐에 따라 승진과 권력에 영향을 줌으로써 모든 학생들이 일류대를 위해 매진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입시경쟁이 완화되려면 이러면 된다.

-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의 차이를 없앤다.

-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임금격차, 승진차별을 없앤다.

 

위 두 가지만 해결되면 기를 쓰고 대학을 가려는 경향이 완화될 것이다. 지금 나타나는 경쟁의 이유는 단 한가지다. 좋은 대학에 가야 이후 돈과 권력획득에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일류대가 아닌 지방에 있는 대학을 나오더라도 평등하게 취직하고 승진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경쟁의 정도는 매우 줄어들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방법으로 ‘지역 할당제’와 같은 제도를 제안한다.

 

(351)

공직사회에서 소극적으로 특정대학이 어떤 비율 이상 공직을 독점하는 것을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공직선발에서 지역별 할당제를 도입하여 처음부터 서울대학을 비롯하여 이른바 명문대학이 공직을 독점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저자는 학벌없는 사회에 있는 사람이다. 학벌없는 사회에 들어가보니 저자의 주장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옮겨 왔다.

 

 

학벌없는 사회(http://www.antihakbul.org/)가 주장하는 6가지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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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국립대 졸업자격을 단일화하라.

1.2. 사립대를 국립대 체제로 전환하라.

 

2.1. 서울대 학부를 개방하라.

2.2. 서울대를 대학원대학으로 개편하라.

 

3.1. 대학서열화 기제인 수능을 자격고사화하라.

3.2. 국립대학 통합전형을 실시하라.

 

4.1. 공직임용제도를 개선하라.

4.2. 특정대학의 고위공직자 비율을 제한하라.

 

5.1. 응용학문을 전문대학원에서 교육하라.

5.2. 대학의 학문체제를 조정하라

 

6.1. 교육권력독점을 해체하라.

6.2.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하라.

 

 

(28-29)

학벌차별이 한국사회 특유의 사회적 불평등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계급론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이 이 문제를 철저히 무시한 까닭은 주관적 또는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 - - , 보다 본질적이고도 - - - 한국의 사회학자들이 존중하는 서양의 계급론 교과서에 학벌이라는 항목이 없기 때문이라 해야할 것이다.

- - -

도대체 누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최고의 지배계급인가? - - - 어쩌면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이 나라 대학교수의 1/4을 차지하며, 국회의원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법조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행정부 최고위직의 2/3를 차지하는 서울대 학벌이야말로 이 나라의 진짜 지배계급이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53)

어이없는 죽음이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언니보다 공부를 못한다고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은 뒤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여고생, 수능시험을 앞두고 저조한 학교성적을 비관해 살충제를 먹고 자살한 여고생, 고등학교 진학 후 성적이 상위권에서 중위권으로 떨어졌다고 자살한 남학생 등등, - - - 이런 죽음들로 인해 한국의 청소년 사살은 가파르게 증가하여, 2000년 10세에서 24세 사이 청소년 사망자들 가운데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교통사고 사망자 1692(35%)명에 이어 856명(19%)으로 두 번째로 많다.

 

(64-65)

서울대 학벌에 의한 이런 권력독점은 비단 행정부나 법조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입법부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14·15·16대 국회의원 총 871명 가운데 서울대 출신은 315명으로 36.1%를 차지한다. 그 뒤로 고려대 출신이 111명(12.7%), 연세대 출신이 50명(5.7%)로 뒤를 잇고 있다. 2004년 4월 15일에 치러졌던 17대 총선에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 - - 이는 우리와 비슷한 일본의 도쿄대학의 경우(18.5%)와 비교한다해도 거의 두 배에 육박하는 점유율이다. 미국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2003년 현재 모두 98명의 상원의원 가운데 하버드 대학 출신은 4명이며 예일대학과 프린스턴 대학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 출신이 각각 3명씩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대학도 5%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 - -

이에 비하면 한국에서 서울대 학벌의 의미는 독점적인 최고권력집단이라 할 수 있다.

 

(78)

이런 사정을 보면 한국에 처음 온 일본사람들이 한국의 대학입시경쟁에 대해 놀라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이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나라에 비하면 일본도 대단한 입시경쟁으로 세계에서 유명한 나라이지만, 그런 일본도 한국에 비하면 상황이 양호한 편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서울대라는 유일한 학벌이 사회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일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 - - 한국사회에서 학벌문제는 다른 무엇보다 서울대의 권력독점 문제이다.

 

(106-107)

도대체 이런 차별이 아무런 죄책감없이 행해질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성적이데올로기가 너무나 편리하게도 성적을 인간성의 훌륭한 곧 인간 자체의 윤리적 가치와 동일시할 수 있는 권리를 교사에게 허락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탁월한 사람 곧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는 만큼 윤리적으로 무가치한 사람 곧 훌륭하지 않은 사람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멸시한다. 까닭없이 사람을 멸시하는 것을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윤리적 기준에서 나쁜 사람에게 대해서는 이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전두환을 멸시할 때, 그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런 멸시가 당연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를 도덕적으로 가장 열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 - 게다가 점점 더 치열해져 가는 입시경쟁은 성적이데올로기를 더욱더 강화시킨다. 입시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성적의 가치는 절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9)

이처럼 성적이 최고의 가치인 학교에서 공부잘하는 학생들은 정말로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허위의식을 내면화시키게 된다. 반대로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자기는 정말로 쓸모없고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 - - 이리하여 학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우월감을 불어넣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열등감을 심어준다.

 

(112-113)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런 긍지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부당하게 차별받고 학대받아도 그에 저항하기 어려운데, 그 까닭은 자기 자신을 쓸모없고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탁월하고 훌륭한 사람에게 지배받는 것을 스스로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리스가 노예는 본성적으로 열등하여 타인의 지배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처럼, 어느 사회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이 왜 열등한 존재인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이론을 고안해왔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지배계급은 공부 잘하는 사람이 우수한 사람이고 공부 못하는 사람은 열등한 사람이라는 신화를 통해 자기들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123)

학벌차별은 계급적 차별보다 훨씬 더 나쁘다. 계급과 달리 학벌은 한번 정해지면 변치 않는다. 한번 지배학벌에 속한 사람은 영원히 그 지배학벌에 속하며 한번 낙오한 사람은 영원히 피지배계급에 머무른다. 이처럼 학벌경쟁에는 이른바 패자부활전이 없다. 스무살 전후 한 번의 경쟁에서 뒤처지면 영원한 노예의 낙인이 찍히는 사회가 한국이다. 이런 학벌의 고정성 때문에 학벌경쟁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무한경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온간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 - - 후천전 신분이라 할 수 있을 - - -

 

(142)

한국의 학벌을 따지는 유학생들이 정작 지금 자기가 다니고 있는 독일대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학벌의식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 - 독일학생이든 한국 유학생이든 단 한 번도 마인츠 대학을 우리학교라고 부르는 사람을 본 적도 없다. 모두 자기가 공부하는 학교를 우리 학교라고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마인츠 대학이라고 꼬박꼬박 3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 - - 독일의 대학생들은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다 해서 우리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학연이 학연에 의한 파벌은 학벌로 탈바꿈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독일 사회에는 학연이 있을 뿐 학벌은 없는 것이다.

 

(168-171)

가정은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대관계에 기초하는 공동체인 반면, 폴리스, 즉 나라는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형성되는 공동체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폴리스는 단순히 자유로운 자기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이기도 했다. 가정은 자연적 필연성, 쉽게 말해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을 위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공동체요, 인간이란 종의 생물학적 존립을 위해 요구되는 공동체였다. 이에 반해 폴리스는 한갓 먹고사는 것이나 생물학적 존재, 곧 생존 이상의 가치, 즉 모든 필연성에서 벗어난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였다. 이런 의미에서 폴리스는 가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공동체라고 이해되었던 것이다.

자연적 공동체와 인륜적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던 만큼, 서양의 전통 속에서는 그 공동체들이 다스려지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즉 가장이 가정을 다스리는 것과 정치가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지배행위였다. - - -

이처럼 국가를 자연적 공동체인 가족과 명확하게 구별되는 인륜적 공동체로 본 서양사람들과는 달리 우리의 전통 속에서 언제나 국가는 확장된 가족이었다. - - -

- - - 즉 유학은 백성이 부모를 섬기듯이 임금을 섬기고 임금은 자식을 돌보듯이 백성을 다스릴 때 가장 이상적인 왕도정치가 실현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유학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그 크기에서만 다른 것일 뿐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 - -

개인의 충돌하는 이익을 조화시키고 사회를 평화롭게 유지하는 것은 모든 시대의 과제이다. 그런데 도식적으로 비교하자면 서양과 동양은 이 과제에 대해 상반된 해결책을 선택했다.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를 건설하기 위해 가족을 지양하려 했던데 반해 중국인들은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만듦으로써 평화를 얻으려 했다.

 

(174)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큰 가족(사회적 가족 또는 국가)과 작은 가족(혈연적 가족)이 충돌할 때, 유교가 작은 가족의 이익을 큰 가족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데 있다. 유교는 국가를 거대한 가족으로 만듦으로써 모든 백성들은 가장 친밀한 가족애 속에서 평화롭고 조화롭게 결속하려 했으나, 가족이 아닌 사람을 어떻게 가족을 대하듯이 대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리고 혈연적 가족애 속에 숨어있는 가족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어떤 구속력 있는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 결과 유교의 가족주의는 그 지향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인 대동사회를 꿈꾸었으나 현실에서는 너무도 쉽게 가족이기주의 정당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76)

- - - “조선 후기 사관 1031명 가운데 777명이 벌열 출신으로 전체의 75.0%를 차지하고 있다. - - - 순조대 이후에는 벌열이외에는 사관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전통사회에서는 가족과 권력은 뗄 수 없이 공속하고 있는 사회구성의 두 계기들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나라의 권력이 가족공동체를 중심으로 배분되던 전통이 오늘에 와서 학벌위주의 권력배분과 맥이 닿아 있으며, 권력배분의 양상 역시 과거의 벌열가문 중심의 권력독점 양상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학벌 역시 유사 가족공동체이기 때문이다.

 

(181)

그러나 부모된 임금의 보살핌아래 온 백성을 한 가족으로 만들려는 유학의 이상은 혈연적 가족을 사회적 가족보다 더 중요시하는 유학의 근본논리와 결코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한편으로는 임금이 백성의 부모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정치의 이상을 끊임없이 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자신을 비롯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가족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할 때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가족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면 왕도정치의 이상은 한갓 사대부들의 허위의식이었을 뿐, 나라는 오로지 가문의 영광을 위해 경쟁하는 씨족문중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던 바, 그렇게 국가가 아무런 내실도 없는 껍데기로만 남았을 때, 불행하게도 우리는 새로운 국가를 우리 손으로 건설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187-188)

- - -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대학이 인륜적 공동체라는 본질적 자리에서 이탈하여 유사가족으로 변질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그것은 오직 대학이 자기 고유의 보편적 목적과 이상을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즉 대학이 학문의 연구와 교수라는 본래의 목적을 팽개쳐버리고 오직 공동체 구성원들의 복리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때, 대학은 인륜적 공동체가 아닌 유사 가족으로 변모하면서 학벌의 모태되는 것이다. - - -

- - - 그리하여 한국의 대학들은 명목상으로는 전문적인 학문의 연구와 가르침을 위해 존재하는 학문기관 및 교육기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자체로서는 학문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떤 다른 목적에 봉사하는 기형적 공동체이다.

이 말은 학문의 연구와 가르침이 아니라, 학문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다른 어떤 이익이 한국 대학의 존재이유라는 뜻이다.

 

(191-192)

한국의 대학은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같이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 그것은 대학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존재하는 한 학문의 연구와 가르침이라는 목적을 최소한 명목상으로라도 보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은 다른 한편에서는 출세와 권력획득의 발판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을 수도 없다.

 

(209-210)

사람들 사이의 가족적인 친밀함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학벌구성원들 사이의 맹목적 친밀감이 공공적인 정의를 위협한다는데 있다. 이런 부작용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정의의 보루가 되어야 할 법조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 - -

의뢰인들이 능력있는 변호사보다 판·검사와 학연이 닿는 변호사를 선호하는 것은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236-237)

- - - 바칼로레아의 시험이 어려운 것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 - 이런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정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물음들은 정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 - -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시험을 통해 대학선발시험을 치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수학능력시험이 이렇게 출제된다면, 다른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학생이나 학부형도 자기가 왜 남보다 더 나쁜 점수를 받았는지 승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냐 연·고대냐 하는 것이 평생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사회에서 어느 누가 확립된 점수체계없는 주관적 물음과 주관적 평가를 받아들이려 하겠는가? 학생들을 대학 서열에 따라 아무런 소란없이 분류해 넣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물음과 대답, 맞고 틀림, 결과적 점수가 분명한 객관식 시험이 아니고서는 다른 평가방법을 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 - -

입시 위주 교육의 병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입시경쟁이 치열해지면 질수록 시험은 어려워지고 그에 따라 외워야 할 정답의 양, 습득해야 할 지식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이렇게 극단화된 시험경쟁은 학생들에게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을 빼앗는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일하는 한국의 40대 아버지보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해야 하는 곳에서 공부 이외에 아이들에게 허락된 삶은 없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부터 자정이 넘도록 책상머리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한국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삶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아무리 많은 앎을 습득한다 하더라도 그 앎을 자신의 삶속에서 검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한생들에겐 앎 밖의 삶이 아예 처음부터 허락되어 있기 않기 때문이다. - - - 곧 죽은 지식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한국교육이다. 한 번도 골프장 근처에 가보지 않은 학생이 ‘체육과 건강’ 시험을 보기 위해 드라이버 샷, 아이언 샷, 어프로치 샷, 벙커 샷 그리고 퍼팅이 무엇인지를 무작정 외우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교육의 현실이다.

 

(252)

무슨 자치활동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모두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들로서 학생회 임원을 맡아 내신성적에 도움이 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모두 쓸데없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하물며 학교 밖의 세상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더욱 주제넘은 일이다.

미군 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깔아 죽였는가? 대학가서 데모를 하든 말든 지금은 공부나 해라. 네이스(NEIS) 때문에 사회가 소란스러운가? 자기 자신의 신상정보가 어떻게 집적되든 말든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공부나 해라. 이것이 모든 일에 대해 학생들이 위해야 할 태도에 대한 유일한 지침이다. 사회에 대한 관심, 이를테면 정치에 대한 관심은 입시를 앞둔 학생들에게는 모두 주제넘은 일로 치부될 뿐인 것이다. 생각하면 40여년전에 4·19의 발단이 되었던 것은 마산의 중·고등학생들이 벌였던 최초의 시위였다. 그리고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걸핏하면 학생이 교사들과 같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데모를 한다. 그에 비하면, 지금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은 문자 그대로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들이다. 사회를 위하여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이 나중에 그 일을 하겠는가?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청소년기에 공동체의 공공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나중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교육은 학생들을 공동체의 복리와 정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성숙한 인간으로 기르지 못하고 그저 출세와 영달을 위해 점수 1-2점에 죽고 사는 비루한 인간들을 길러낼 뿐인 것이다.

 

(276)

- - -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시험의 노예가 되어버린 교육은 아이들이 한가하게 예술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감상의 대상으로 만나야 할 예술작품을 시험문제로 만나게 함으로써 미적 체험을 왜곡시키고 아이들을 도리어 예술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한국의 예술교육은 음악, 미술, 문학 가릴 것 없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문제의 뿌리에는 입시경쟁이 있고, 다시 그 바탕에는 학벌사회가 있을 뿐이다.

 

(304)

학문에 대한 이런 규정들은 오늘날 한국 대학의 현실을 살펴볼 때 얼마나 사치스럽고 낯설게만 들리는가? 한국이 대학은 자유로운 정신들이 자발적인 결단에 따라 선택하는 학문의 전당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시험교육을 통해 철저히 타율적으로 사유하도록 길들여진 젊은이들이 자기의 적성이나 자유로운 의사와 무관하게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제되는 그런 소외된 필연성일 뿐이다. 학벌이 사회적 신분의 잣대가 되는 사회에서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떤 학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는 한국 사회에서 족보없는 존재 곧 천민으로 전락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319)

한국의 대학들은 공학은 물론이고 도저히 학문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없는 기술과 예술에 대한 전공들을 백화점식으로 개설하고 있는 바, 결과적으로 이런 행태가 대학과 전문대학의 고유한 정체성을 훼손하고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323)

논쟁과 경쟁을 통해 학문은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논쟁이든 경쟁이든, 학문적 다툼이 생산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선결조건이 의사소통의 개방성과 평가의 공정함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한지가 개방적이고 공정한 의사소통의 지평속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다면, 논쟁도 경쟁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학계에서 개방된 논쟁과 공정한 경쟁을 찾아보기 어렵다. - - - 그것은 어떤 학자를 학문적 자질을 통해 평가하기 보다는 학벌을 가지고 평가하려 하기 때문이다. - - -

게다가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교수 채용과 같은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될 경우 평가의 공정성은 더욱더 유지되기 어렵다.

 

(328)

한국의 모든 학교의 학급당 인원이 10명 이하로 줄어들고, 교사 1인당 학생수가 선진국 수준보다 낮아져 세계 최고의 공교육을 실시한다고 가정해보자. 더 나아가 비록 비현실적인 환상이기는 하겠지만, 모든 학생들이 시험을 볼 때마다 전과목에서 만점을 받을 정도로 학교교육이 충실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사교육이 없어지겠는가? 유감스럽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학생들이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서울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학생의 수는 4000명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 - -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입시경쟁이 모두를 위한 경쟁이 아니라 오직 극소수 명문대 정원을 향한 경쟁이므로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353)

그렇게 공직에서 학벌독점이 타파되고 나면, 지금처럼 모든 학생들이 하나의 대학을 선호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학벌에 따라 똘똘 뭉쳐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특정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359)

- - - 바람직한 사회에서 공교육의 이상은 한마디로 말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빈부귀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동등한 자기실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기성세대의 사회적 불평등이 자녀세대에게 대물림되고 또 확대 증폭되는 것을 방지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통합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364-365)

- - - 경쟁이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다 활동적으로 만들어 자기의 잠재적인 소질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들어 그것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자기 실현을 위해서도 기여하는 한에서만 경쟁은 건강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경쟁이 승자만을 위한 것이 되어 이긴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지만 진 사람은 모든 것을 잃는 투쟁이 되어버린다면, 그런 경쟁은 공공적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미화될 수 없다. - - -

그런데 오늘날 교육에 도입된 경쟁은 소수의 승자를 위해 절대다수의 패자들을 희생시키는 검투사적 투쟁이다.

 

(373)

결국 서열화되고 비평준화된 대학체제가 이런 식으로 고등학교에서도 서열과 입시를 강요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수순인 것이다.

 

(375)

- - - 이즈음 고교 평준화가 위협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대학이 평준화되지 않고 고착된 서열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대학서열이란 그 자체로서 학벌에 의한 차별을 낳는다는 점에서도 문제지만, 중등학교의 서열화를 조장하고 평준화를 근본적으로 위협한다는 점에서도 시급히 타파되어야 할 폐단이다.

 

 

머리말

학벌을 그 근거에서 사유하는 것|학자들을 위한 서론

 

1. 권력의 독점과 사회적 불평등

- 어떤 죽음

- 서울대와 권력독점

- 학벌과 계급

- 학벌과 탁월함의 신화

- 학벌과 불평등

2. 학벌과 사회적 주체성의 문제

- 학벌 개념의 모호함

- 공동주체성

- 서로주체성의 변증법

- 학벌의 계보

- 학벌과 주체성의 왜곡

- 학벌이기주의와 공동체의 붕괴

3. 학벌과 교육의 파탄

- 공교육 파탄의 뿌리

- 전인교육의 붕괴 1: 생각의 힘에 관하여

- 전인교육의 붕괴 2: 도덕에 관하여

- 전인교육의 붕괴 3: 예술교육

- 시험의 획일성과 개성적 전문교육의 불가능성

4. 학벌과 국가경쟁력의 위기

- 개성적 재능의 억압

- 학벌과 대학교육의 위기

- 사교육의 폐해

5. 교육의 이념과 학교 평준화

- 대학의 평준화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

- 평준화된 학교교육의 이념과 대학 평준화

6. 학벌타파의 구체적 대안들

- 미신의 비판

- 실천의 원칙

- 서울대 학부 폐지

- 권력분산의 제도화

- 교육개혁의 과제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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