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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산행일지

등반자료 8천m에서 만난 ‘하얀 고독’

넷볼러 2016.10.13 21:50 Views : 303

 

사상 첫 에베레스트 무산소 단독 등정 등 산악계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 인터뷰
“8천m 14좌 첫 완등은 당시 인간 한계에 도전
고독은 두려움 아닌 삶의 또 다른 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도, 누군가 내게 숨결 하나조차 건넬 수도 없는 절대적인 시공간에 놓였다.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절대 고독’이란 존재할까? 그 나락의 진짜 깊이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71)는 ‘절대 고독’을 경험했던 사람이다. 1978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단독 등정’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한 이가 메스너였다. 마흔 살을 갓 넘긴 1986년에는 로체를 끝으로 세계 첫 히말라야산맥의 8천m 이상 봉우리 14좌를 모두 등정했다. 특히 그는 동료나 안내인(셰르파)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산소통의 힘도 빌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초인’ ‘전설’ 따위로 불렀다. 어떤 인간도 발을 대지 못했던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그가 느낀 완전한 고립. 그는 이걸 ‘흰 고독’이라고 불렀다.

 

 

완전한 고립에서 자유 얻는 ‘흰 고독’

 

 
‘전설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는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두려움이 아닌 삶의 희망을 만났다”고 했다. 10월1일 메스너가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태산을 움직이다’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메스너는 자신의 책 <검은 고독, 흰 고독>(2007)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알고 싶고, 또 새롭게 느끼고 싶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준다. 고독감이 파멸을 의미한 것은 옛날이야기다. 이 고요함 속에서 분명히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고독이란 정녕 이렇게 달라지는가. 지난날 그다지도 침통하던 이별이 이제 자유를 뜻하는 것을 알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 고독은 두려움이 아니고 힘이었다.”

 

10월1일 울산 울주군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에서 만난 메스너는 “첫 아내와 헤어졌을 때 지독한 ‘검은 고독’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내가 혼자 남겨졌다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가장 높은 산이 있는 곳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흰 고독’을 만났다”고 했다. 산 아래서 버림받고, 홀로 남겨졌을 때 ‘검은 고독’을 ‘흰 고독’으로 극복한 것이다. 산사람의 회색 눈이 빛을 냈다. 그 눈동자가 담긴 눈매는 깊었다. 그는 제1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 ‘낭가파르밧 특별전’ 참석과 특별강연을 위해 방한했다.

 

 

불가능하다던 ‘신의 영역’ 14곳에 발 디뎌

 

메스너의 8천m 도전 역시 아픔을 딛기 위한 과정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책임이 따릅니다. 그걸 잘 몰랐던 시절 ‘검은 고독’을 겪으며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 8천m 이상 정상에서 흰 고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흰 것 반대편에 검은 게 있듯, 고독은 삶의 절반입니다. 혼자 지내는 것을 연습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더 많은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오른 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작은 실수만으로 언제든 죽음과 만나게 되는 곳이다. 이미 그는 1970년 낭가파르바트(8125m) 등반 도중, 자일 파트너였던 동생 귄터를 잃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탈수로 주저앉은 동생의 입에 눈을 담은 뒤, 자신의 입김으로 눈을 녹여 한 모금 물을 먹여줬다. 그러나 그가 하산 루트를 찾아나선 사이, 쏟아진 눈더미에 귄터가 파묻혔다. 자신도 목숨만 건졌을 뿐 동상으로 발가락 7개를 잘라냈다. 동생의 주검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세 차례나 낭가파르바트를 다시 찾기도 했다.

‘흰 고독’을 만나러 가는 훈련은 더 혹독해야 했다. 그가 한창 훈련하던 시절, 900m 산길을 15분 이내에 오르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또 자신이 지내던 기숙사의 20m 높이 담벼락을 손가락 힘이 풀려서 떨어질 때까지 매일 오르내렸다는 일화는 그가 쓴 책 <제7급>을 통해 잘 알려졌다. 이전까지 등반계에서 최상급 난도의 자유등반을 일컫던 ‘6급’을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인 ‘제7급’을 개척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수직에 가까운 500m 길이 암벽을 휴식 없이 등정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춰야 했다.

 

그가 더욱 위대한 것은 이전 인류가 감히 생각조차 못했던 방식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그는 1978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산소통 도움 없이 오르는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당시 메스너가 동료 페터 하벨러와 함께 무산소 에베레스트 등정 계획을 발표하자, 여론에서 “생명을 경시하는 미친 짓”이라고 했던 일이다. 2년 뒤 ‘8천m 무산소 단독 등정’에 성공해 세계 산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게다가 그의 등반법은 원초적이었다. 6명 이하 소규모 등반대가 셰르파나 산소통 없이 수십 시간 안에 정상을 공략하는 ‘알파인 방식’을 8천m급에 적용한 것이다. 한국 등반계에서도 14좌 완등자가 꽤 있지만, 대개 현지 안내인을 포함한 수십 명의 원정대와 각종 장비를 갖춘 뒤 몇 달에 걸쳐 정상을 공략하는 방법(극지법)을 쓴다. 이 경우, 정찰조가 먼저 정상까지 가는 루트를 확보해 고정 로프를 연결해두고, 베이스캠프에 대기하던 공격조가 기상 상황 등을 고려해 정상을 공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메스너는 이미 1975년, 산소통 없이 가셔브룸1봉(8068m)을 57시간 만에 등정했다.

 

메스너는 “산소통을 사용하는 것은 8천m급 등반의 가치를 6천m급으로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은 순수하고 공정한 방법과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흔 살을 넘겼지만, 그는 지금 기준을 대도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한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오른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그 위에 오른다는 게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감정일 것 같았다. 그는 “세계 최고의 정상에 오른다는 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정상의 높이가 높을수록 특별한 기분이 덜하다. 왜냐면, 정상이란 게 굉장히 좁은 공간이다. 산소도 부족해서 안전 문제 때문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빨리 내려올 수밖에 없다(웃음)”며 “대개 정상에 올랐다는 환희와 기쁨은 하산한 뒤, 최소한의 안전이 확보된 곳에서 누리게 된다. 그때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실패했을 때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10월1일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만난 라인홀트 메스너는 산 정상에서 만나는 외로움은 환희에 가까운 ‘흰 고독’이라고 말했다. 메스너의 깊은 눈매가 삶의 철학을 말하는 듯했다. 홍석재 기자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산소통 같은 장비의 도움 없이 고산을 오르는 ‘알피니스트’(알파인 방식의 등정을 하는 이들) 가운데는 실력이 좋은데도 산에서 숨진 이가 많다. 그는 “지금 60~90살 이상 모험가들 가운데 ‘최고’라고 불렸던 많은 사람들이 숨졌다. 내게는 행운이 따랐을 뿐이고, 그래서 눈에 띄는 인물이 됐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실패했을 때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시행착오를 겪으면 더 많은 시도를 했다. “등반가의 삶에 행운이 따라야 한다. 산에 오를 때마다 할 수 있는 최대의 준비를 했다. 삶을 냉소적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메스너 이전의 인간계에는 ‘6등급 등반’(당시 최고 난도 자유등반 등급)만 있었지만, 그는 ‘7등급’ 등반 방식을 개척했다. 한때 신(神)의 영역을 넘봤던 메스너다. 그는 종교를 믿는 대신 스스로를 ‘가능성주의자’라고 부른다. 신의 존재를 비롯해 어떤 가능성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으면,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넘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종교를 더하면 신의 수만 수천, 수만을 넘는다. 모든 종교를 존중하지만, 원초적으로 종교는 권력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판타지(환상)이다. 그러나 산에 오르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긴 영역에 도전한다는 순수한 의미에서 종교와 닮아 있다.”

 

그는 최근 한국을 비롯한 산악계가 8천m 이상 고산을 경쟁하듯 오르는 일에 대한 우려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등반이 반드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순수한 뜻으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라든가, 경쟁을 하는 것에 무조건적 비판을 하고 싶진 않다”면서도 “알피니즘은 무정부주의와 관계 있다. 경쟁과는 관계가 없다. 등반은 이전 세대의 인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도전 가운데 하나다. 등반의 역사가 내내 그랬다”고 말했다.

 

그는 1988년 캐나다 캘거리 겨울올림픽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은메달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가 산악계에서 이룬 전인미답의 업적을 기린다는 뜻이었다. 그는 제안을 거절했다. “산을 오르는 데는 경쟁하는 상대가 없다. 모든 등반은 서로 조건도 다르다. 누가 이겼는지를 가를 심판도 없다. 나 자신과의 싸움만이 있다”는 게 수상 거부의 이유였다.

‘8천m 14좌 등정’을 목표로 삼고, 결국 이를 달성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걸 굳이 왜 다 올랐느냐고 묻는다면, 그게 있으니까 오른 것이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8천m급 14개 봉우리를 다 오른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다. 14개 봉우리라는 수치나,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에 도전한 것이다.”

 

 

일흔 넘긴 나이에 ‘일곱 번째 인생’ 도전

 

어느덧 일흔을 넘긴 나이가 됐다. 어린 시절 암반으로 첫 번째 인생을 시작했고 고산, 남극, 북극, 몽골 고비사막, 예티(히말라야산맥 설인) 연구, 산악 박물관 준비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 앞서 그는 70여 편의 책을 썼고, 그의 실화를 다룬 영화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이 제작됐다. 이제 그는 등반가들이 겪었던 극한의 삶을 영화화하는 작업으로 ‘일곱 번째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울주(울산)=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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